현대의 주류경제학은 '시장을 완전경쟁시장으로 완성시키고
가격이 희소성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될 때
해당 사회의 자원배분은 최고의 효율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효율이란것은 해당 재화가 소비될때의 '만족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 논의가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만족도'가 어느정도 측정 가능하고,
가격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각 경제주체간 만족도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 동의가 없으면 사실상 최고의 효율이니 어쩌니 하는것은 헛소리로 전락한다.
그런데 과연 그 방식대로라면, 사회전체의 자원배분이 효율을 이룰수 있을까?
사실상 현대경제학이 주장하는 '희소성의 원리'와 '완전경쟁시장'은
서로 모순적인것이라 애초에 이 논의는 매끈하게 출발하여 한마디의 정리로 봉합할 수 없게끔 되어있는 듯하다.
(내 생각엔 이 모순때문에 '완전경쟁시장'이란 애초에 달성될 수 없는 공상의 것이다.)
이에 관한건 다른글에서 다시 이야기 해보자.
아무튼 '희소성'의 원리에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사실상 '더 높은 쓸모'에 해당 재화가 알아서 찾아가서 소비되길 원하는 생각에서 강구된듯하다.
다시말해서, 어떤 한정된 재화에 대해서 '더 많이 쓸모있다고 느끼는 경제주체'가 있다면
그 재화에 대해서 '더 많이 지불하고' 가져가서 쓰라는 것이다.
이제 극도로 희소한 재화를 하나 상정해보자. 천년된 산삼이 발견되었다.
이 천년된 산삼은 엄청난 특효를 가지고 있어서 이 세상에 알려진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천년된 산삼이 사회적으로 효율적인 분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환자에게 돌아가야 옳다.
하지만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천년된 산삼은 '얼마나 불치의 가능성을 가진 병을 갖고 있는가' 보다는
'얼마나 산삼을 사고 싶어하는가'에 초점 맞춰져서 가격이 매겨지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천년된 산삼을 먹으면 왠지 정력이 좋아질거같은 생각에,
혹은 요즘 몸이 좀 허한데 천년된 산삼 먹으면 왠지 기운이 솟아날거같은 생각에,
돈많은 재력가들이 서로 구입하려고 달려들어 산삼의 가격을 높이고 누군가 구입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A라는 재력가가 T라는 재화를 소비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100이다.
그리고 B라는 가난뱅이가 T라는 재화를 소비할때 느끼는 만족감도 100이다.
둘이 T를 소비할때 느끼는 만족도는 같지만, 같은 T에게 어떤 값을 지불하겠냐고 물으면
A는 B보다 높은 값을 제시할 가능성이 확실히 크다.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B의 만족도가 사회적으로보기에 조금 더 크다고 할지라도,
B가 제시하는 가격보다 A가 제시하는 가격이 훨씬 높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이 말은 곧, 희소성은 언제나 '부자'의 편이라는 의미이고,
결국 '가난'은 희소성의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가격'에 언제나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경제가 완벽한 균형상태를 이룬다한들,
재화가 적재적소에 제대로 분배되어 자원배분의 최고 효율을 달성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위의 논의를 제대로 따라왔다면 파악하였겠지만,
그것은 지불하는 '가격'이란 것이 사회적으로 측량될 수 있는 소비에 대한 '만족도'에 결코 비례하는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갖고있는 부에 따라 상대적인 수준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는 '절대 부'와 '절대 가난'이
사회적 소비 효율성을 달성하는데 방해요소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렇듯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완전경쟁시장을 논하기에 앞서
'절대 부'와 '절대 가난'이 존재하는 이상 사회적인 효율적인 자원분배는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경제학은 최고의 효율을 연구한다하면서 개인적인 부와 가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가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갸우뚱'하게되는 이유중 하나이다.
2008. 9. 10.
GyoolG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