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S 다큐프라임 <창의성을 찾아서> - 3부 : 함께 만드는 세상의 변화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IQ(지적능력 지수)가 아닌 EQ(창의력 지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유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의 성장을 이룩하고 글로벌 경쟁체제의 한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선진문물/사상'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성장동력을 찾는 일이 한계에 다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요구와는 달리 우리 교육은 변하지 못하고 있다. 창의력을 요구하는 시대의 조류에 대응한다는 것이 기껏해야 부잣집 자식들의 EQ 학습지, 혹은 과외가 고작이다. 창의력이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힘을 일컫는 말인데, 그것을 '가르친다'라니. '창의성'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걸음마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필자가 대학을 다닌 것도 벌써 5년이란 세월이 꽉 찼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종종 느끼는 것은 '왜 이것을 배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책을 열어 적힌 활자를 읽고, 기껏해야 칠판에 몇 자 끄적임을 더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몇 백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학비를 내느니, 책을 몇 권 더 사고 남는 돈으로 자기 개발에 쓰는게 더 낫지 않은가! 게다가 요즘에는 멀티미디어 수업이 강화되면서 PPT를 하나 만들어놓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주기만 하면되니, 그나마 칠판에 끄적이는 것 조차 더 할 필요가 없다. 같은 강의를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재수강을 해도 수업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간혹 나눠주는 유인물에 년도가 작년 것으로 잘 못 표기되어 있는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이다.
그 사회의 지적수준의 기반이 되는, 또 되야 할 대학. 항상 새로운 것이 태동하고, 실험적인 사상이 넘쳐나야 할 대학이 낡은 지식에 매여 있다. 그저 선진국들이 더 나은 학문을 개발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다. 대학 수뇌부들은 달력 한권이 넘어갈 때마다 군침을 흘리며 학비 올릴 구실만 찾고, 이 학교든 저 학교든 모두들 자기 성과 부풀리기에만 급급하다. 학생들도 학교의 이름만 보고 덤벼 뿐, 그 안에 어떠한 교수진이 있는지 가르치는 내용은 어떤 것인지 알려하지 않는다. 과연 그만큼의 학비를 지불할 만큼 괜찮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눈꼽만치의 관심도 없는 것이다.
위 이미지에 등장하는 기데온 로위 교수(서울대)의 말은 이러한 우리 대학교육의 맹점을 부각시켜 표현해주고 있다. 물론 저 주장은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저 주장의 근거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 하는 서울대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실력은 세계 30위권이지만 '노벨상'수상자가 없어서 50위권 정도로 밖에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노벨상이란 무엇인가. 그 해 각 분야별 가장 뛰어난 업적을 기념하는 상이다. 물론 인종적 차별이 어느정도 존재하고, 우리나라가 독립언어(한글)을 사용하는 이유로 학문분야에서 좀 불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들 만으로 설득력있는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노벨상을 거머쥐기 위해, 즉 그 해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기데온 로위 교수의 언급은, 학문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도 없는 것에 대한 우리나라의 근본적 원인을 잘 짚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기데온 로위 교수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창의적이지 못한 원인을 권위주의에서 찾고 있다. 아주 들어맞는 말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주장이다. 창의력은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다양성은 '실패'를 용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다양성은 최대 효율이 아닌, 최다 시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권위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으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의 권위주의 팽배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또 과연 교육만이 문제인 것일까? 우리사회의 권위주의적 면모는 비단 교육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회사에서도, 심지어는 집안과 교우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생활 가운데 하루에도 수십수백번씩 크고작은 권위와 맞닥들인다. 그리고 우리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길을 택했을 때, 사회는 그 개인에게 사회적 이단아라는 낙인을 찍어 버린다. 특히 그 중에서도 정치는 우리 사회의 특성상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도, 권위주의가 가장 짙게 고착화 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 정치가들은 그들의 기준에 따라 사회적 도그마를 성공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한민족의 분단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세운지 반세기가 훌쩍 지난 대한민국의 오늘날 정치 수준이 이 정도이다.
이와 같이 사회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권위주의는, 기데온 로위 교수의 말처럼 역사적으로 전래되어 내려오는 '유교문화'와도 밀접하게 닿아 있다. 또 한편으로는 6-70년대를 거치며 단일 리더쉽 아래 획일화 된 계획경제를 통해 고속 경제성장을 경험했던 우리나라가 단일 리더쉽의 '효율'을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6-70년대에는 우리가 따라가야할 역할모델(roll-model)이 존재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뒤따라갈 선진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길을 놓아야 한다.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만들기'가 아닌 '발명'을 해야한다. 이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과제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여기서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창의력의 제고가 필수이고, 그를 위해서는 사회적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그 선결조건으로 실패를 용인하며, 도전을 높이 사는 사회분위기 조성을 이야기 했다. 우리는 많은것이 변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초 강대국의 경제가 흔들리고, 지난 날의 약소국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의 깃발이 내일까지 걸려 있으리란 보장이 없는 이 시대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지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판단하여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에 있다. 효율성을 위해 획일화된 가치를 주장하기에는 너무 많은 위험성을 떠안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더디게 가더라도 '더 나은' 길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듣고, 이야기하고, 경험해야만 한다. 그러한 면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건전한 '민주주의의 발전'은 창의력과도 많은 부분 그 성격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미래상을 제시해줄 리더쉽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현 정부의 정책적 방향성과 또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건대, 다양성이 용인되는 우리 사회의 미래상은 여전히 묘연하기만 하다.
2009. 1. 16.
GyoolGoon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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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1
2009.04.20 20:36
공감 공감공감공감....늙은이뿐만이 아니라 그들한테 그대로 보고배운 젊은이조차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죠. 입으로는 개성을 외치면서 자기들과 다른 스타일을 왕따시키니 그들한테 무슨 창의성? 자기들과 생각 다르다고 구속 수사하는 이 정부에서 창의성 인재가 진짜로 필요하긴 한건지 의심! 유교적 사상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한국에서 가장 파워가 쎈 개신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와 유교가 수백년에 걸쳐 부패했다면 개신교는 50년만에 그걸 달성했으니까요. 개신교가 다양성 및 창의성을 요구하는 종교는 절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