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무학의 통찰(이라고 쓰고 잡생각이라고 읽는다)

1. [경제 1] 신자유주의적(시장근본주의적) 경제가 절대 완성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정책과 기술을 사용해도 '정보의 비대칭'과 '지리적 비대칭'을 해소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를 펴는 진영(사람)은 언제나 그것을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정보우위자(또는 진영)'일 수밖에 없다. 현대 시대는 정보우위자가 대부분의 경우에 힘의 논리에서도 앞서는 상황이기 때문에, 정보열위진영이 언론, 학계, 정치 등에서 밀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를 해결하려면 반대진영(정보열위자)의 자발적인 자각과 자발적인 대규모 결집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흡사 공화국시대를 무너트리는 민주화운동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러한 모양을 두고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 보수진영이 이 용어를 선점하고 의미를 왜곡하면서 경제민주화진영의 내부 오해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2. [경제 2]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부터 두드러진 세계경제의 가장 거대한 변화는 '금융'이 '제조업'을 밀어내고 세계시장의 중심산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경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비물질'로부터 발생하는 '효용과 가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과연 '수단'(화폐)이 생산하는 '가치'(이자)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단'이 생산하는 '가치'의 적정한 크기는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시장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똑똑함이 없다. 즉, 시장은 멍청하다.)
3. [경제 3] 금융산업이 비대해지면서 대두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시장기능이 왜곡된다는 점이다. 안그래도 시장은 정보와 지리적 비대칭때문에 멍청하기 이를데 없는데, 금융은 그 가치계산의 단계를 몇단계 세탁해버리면서 시장의 멍청함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금융산업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발생시키는데, 이 이자의 결정이 굉장히 비합리적이다. '돈'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기계류와는 달리 직접 가치를 생산하는 수단이 아닌 가치교환의 수단이다. 그리고 순환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장담할 수 없는 '미래소득'을 예상하며 현재의 급박한 상황을 해소하고자 돈을 빌린다. 급박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미래소득의 획득 기대심리를 실제보다 고평가 하게 하고, 이자수준도 실제 갚을 수 있는 것보다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다. (실제 갚을 수 있는 이율보다 더 높은 이율을 제시해도 빌릴수 밖에 없다는 의미와 같다.) 즉, 금융산업은 실제 생산 불가능한 이자를 생산해내고, 그 이자의 부족분은 결국 다른 대출로 메꾸어지거나, 가렴주구식으로 경제 최하층민들이 노동력의 저가제공으로 그 부담을 떠안게 된다. (특히 대출의 경우 같은 사람이 아닌 몇 사람을 거친 대출이 그것을 메꾸는 것이므로 쉽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금융산업은 이렇게 비대해지고, 어느순간 그것에 구멍이 나면 그것이 스테그플레이션과 경제불황으로 이어진다. 금융산업의 가장 무서운 점은 금융의 이율 왜곡이 전 시장의 인플레이션을 견인하면서 전반적인 시장기능 왜곡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4. [경제+신앙] 요즘 시대의 전사회적인 '자기애'의 확산 및 강화는 기독인의 감소와 맞닿아 있다. 요즘 세대의 사람들은 '자기애'를 기본적인 덕목으로 생각한다. 자신감이 사회생활을 하는 가장 첫번째 무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애의 확산은 신기하게도 '시장논리의 확대'와 맞닿아 있다. 사람들은 '소비'를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고평가 한다. 즉,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내가 높은 사람이 된듯한 느낌을 경험하고 반복하면서, 정말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시대의 '가치'는 그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금에 들어있다. 내가 지불을 하고 소비가 종료되면, 그 가치는 이미 완전히 이전되고만다. 다시말해서, 소비가 종료되면 나는 더이상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가치를 갖고 있지않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오해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심리와 현실간의 간극은 기독인의 감소뿐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적 문제ㅡ자살, 살인, 강간, 절도 등ㅡ를 양산한다.
5. [신앙1]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장의 과정 중 대단한 결핍을 경험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심리적, 물리적, 경제적 결핍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나님을 도피처로 인정하는 것이다 - 이 인정이 발전되면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다.-. 그리고 둘째는 믿음의 가정에서 상처없는 온전한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의 인성, 가치관등은 매우 안정적인 상태인데, 그 재료가 신앙이므로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신앙적인 삶 이외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 중간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물질 풍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중간지대의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기독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이 주장의 튼튼한 근거가 된다.
6. [신앙2] 예수님께서 교회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좌판을 뒤엎고 내 쫓으시는 장면 속에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의 기자는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라는 해석을 달고 있다. 최근 나는 '성전'의 정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교회는 자신들에게 '현금'을 가져오는 것을 일컫어 '헌금'이라고 표현하며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치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삶,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라고 가르친다. 과연 그것이 맞는 말인가? 현재의 한국교회가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죄는 성경을 근거로 수많은 교인들을 정죄하면서,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성전' 또는 '선지자'라고 칭하며 성역을 쌓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천주교가 종교개혁을 '당하기' 직전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깊은 자성과 혁신을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교인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거나 개혁 '당하게' 될 것이다 -라고 감히 선언한다.

7. [정치] 사람들은 안철수를 보면서 노무현의 노란색을 보았을때의 추억과 쇼크를 호출한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그 호출은 노무현의 실패와도 맞닿아 있어서 손쉽게 안철수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 실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안철수는 그때의 노무현보다 더 약한 인적 네트워크와 정치적 경험을 갖고 있다. 이것은 분명 노무현의 실패를 재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인것이다. 그리고 문재인은 이 지점에서 갈등한다. 그가 노무현의 그림자가 아닌 인간 문재인으로서 스스로를 어필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스스로의 파워만으로 대선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시민들의 감정과 그에 따른 행동양식이다. 사람들은 '최선'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선택을 포기하는 우를 범한다. 그렇기에 현 진보진영의 전략은 스스로를 최선이라고 어필하기보다 '차선을 포기하지 말라'를 어필하는 것으로 선회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