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수의 폭력적 오해와 몰이해, 차별!]
박재훈(www.gyool.net)
초면(初面)의 중년 여성을 '사모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통용되던 상식이자 예의였다. 하지만 사모(師母)가 "존경할만한 사람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로서 해당 여성이 아닌 해당 여성의 남편을 높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 집단의 막연한 선입견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유리벽을 양산할 수 있는지를 다시한번 느끼게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에야 초면의 중년 여성을 앞에 두고 함부로 '사모님'이라는 단어선택을 하는 용감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 여성이 어느 기업에서 여러 부하직원을 거느린 팀장일지, 사장일지, 혹은 교수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비합리적인 여성 차별은 유교적인 문화를 등에 업은 채 참으로 오랫기간 공고히 유지되어 왔다. 아직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지금 이 시점에서 돌아보아도 '어떻게,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대우가 허용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만큼 낯뜨겁고 민망한 차별이 백주(白晝)에 공공연히 일어났던 것이다.
정말,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당연했던 그 시절에 사람들이 주고받던 언행을 떠올려보자.
"여자는 체력이 너무 약해서 바깥일은 힘드니 집안일이나 해야지." "여자는 태생적으로 성격이 소심하기 때문에 큰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여자들은 개인중심적인 성격이 많아서 집단 생활이 어려워." "여자들은 세심한 일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큰 그림을 보며 지시하는 것에는 부적합해." 지금 생각해보면 근본도 없는 막말에 가까운 말이지만, 그 당시에는 여성을 차별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되었던 말들이었고, 심지어는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상식에 근접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근거 없는 상식들은 문화적-제도적 상부구조의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었고, 차별의 피해자들은 하소연할 곳 조차 없는(심지어는 일부 당사자들 조차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 오해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하지만 고작 몇 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먼파워'라는 표현이 유난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할 것 없이 각계각층에서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우월한 성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자면 차별이 당연했던 시절의 '합리적 근거'들은 모두 거짓이고 오류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토록 명백한 거짓과 오류들이 한 사회의 탄탄한 하부구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혼재되어 있을테지만, 나는 그 가장 깊은 뿌리에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다수(남성)의 소수(여성)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가 존재한다고 진단한다. 다수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소수에 대한 오해를 양산·방관하고, 혹은 정말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바람에―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큰 불편함이 없기에― 소수에 대해 몰이해하다.
이는 그것이 의도적인 오해라 할지라도 소수자가 구제받을 수 있는 창구나 제도가 전무하다는 점과 그것이 자연발생적인 몰이해라 할지라도 소수가 다수에 대해 동등한 입장으로 자신을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폭력적이라 할 만하다. 더 큰 문제는 이 '폭력적이고 근거 없는 차별'이 사회적인 비효용도 낳는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우리가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를 유지해온 까닭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들을, 얼마나 많은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얼마나 많은 '김연아'를 잃은 것인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그렇게 차별로 인한 비효용은 공동체 전원이 함께 감수해야하는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 내부 폭력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 함께 지고가야할 손해까지 양산해낸다니, 우리 모두 양팔걷고 나서서 없애야 마땅할 폐단이지 않는가. 우리는 여성차별이 낳는 수많은 부작용에 대해 뒤늦게나마 자각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멀지 않은 과거를 돌아보며 부끄러워할 수 있을 만큼 느린걸음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걸음에는 다수의 폭력적인 오해를 해소하고, 무관심한 몰이해에 대해 교육하는 진득한 노력들이 수반되어 왔다.
물론 모든 차별의 해소가 한 사회에 '이익'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배려'를 동반해야할 수 있으며, 이로인해 사회적인 비용을 함께 감당해야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여성에 대한 전 사회적인 이해가 높아지면서 생리휴가·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보편화되고 이로 인한 대체근무제가 정착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비용'이라며 손해를 운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것이 손해이기 전에 공동체로서 함께 지고 가야할 '당연한 의무'임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차별도 여성 차별과 본질적으로 같은 매커니즘을 안고 있다. 다수(비장애인)는 소수(장애인)에 대해 수많은 오해와 몰이해를 양산·방관하며, 이는 수많은 폭력적 차별을 낳는 탄탄한 하부구조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나는 장애인 차별 해소를 위해 각종 정책과 예산을 마련하고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다수에 대한 오해 해소와 교육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 사회적인 이해도 제고가 동반되지 않는 정책적·경제적 지원은 밑빠진 물붓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거대 기업의 한 일원으로 일하는 노동자이자 장애인 당사자로서 현장에서 겪는 느낌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2등 시민'이다.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포기하거나 잊고 지낼 때는 내 실력만으로 1등이 되기도 하고 선생이 되기도 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이나, 육체적 한계로 인해 타인 앞에서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재확인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을때의 나는 누가 뭐래도 2등 시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 차별 해소에 쏟는 노력의 대부분이 '정책적 보조·지원'이라는 방법론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라도 장애인 차별 해소를 위한 '본질적인 해법'을 재점검 할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나 장애인들을 '지원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회적 짐'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가 함께 배려하며 상생하는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수년 후의 후배들로부터 돌아보기 부끄러운 과거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상식적인 변화의 첫걸음을 시작한 존경할만한 시대로 남을 것인가. 우리 사회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