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Gyool's Universe

Critique

여행 같은 인생, 그리고 '우리의' 장애 _박재훈(www.gyool.net)

 

  가만히 길을 걸으면 내 하얀 스니커즈도 분홍빛으로 물들 것만 같이 벚꽃이 온 세상 가득하던 2012년의 봄 한가운데, 나는 한 공기업의 최종합격 소식을 받아들고는 계획도 없이 혈혈단신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학졸업 직후 창업했던 벤처사업을 건강상의 이유로 부득불 그만두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겠다며 '모험 같은 인생길'에 뛰어든 지 꼭 3개월만의 일이었다. 제주도 여행은 그 모험을 무사히 마친 나에게 스스로가 주는 선물이자 상(賞)이었던 것이다.

 그 여행은 나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의미였다. 진로변경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을 기념하는 것 외에도, 나 홀로 떠난 내 인생 첫 번째 여행이란 점에서도 그랬고, 남들은 제 집 드나들듯이 한다는 제주도를 처음 방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내 장애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뀐 터닝 포인트란 점에서도 그랬다.

 

   

 여행경비를 아끼기 위해 나는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에서 숙박을 해결했는데, 게스트하우스는 일반적으로 다인실로 구성된 숙소로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밤을 함께 보내는 방식의 저렴한 숙박시설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개인 여행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같은 공간에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다 보니 이야기꽃이 피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게 여행에 대한 정보도 교환하고 여행을 하며 겪은 이야기들을 나누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장애상황을 겪는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길을 잃은 이야기,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아 탈이 난 이야기, 바뀐 바이오리듬에 적응하지 못해 몸살에 걸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가 겪은 불편들이 더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외박을 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 중 유일한 장애인으로서 가족들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감기라도 걸린 날이면 어머니며 남동생이며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에 분주했고, 그런 광경은 내게 매우 익숙한 일상이었다. 그런 내가 난생 처음으로 홀로 여행길에 올랐고, 그 곳에서 '나의 일상생활'에 평소 얼마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던 것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식사를 빼먹지 않고 챙기는 일, 식사 후 약을 제시간에 먹는 일, 다리에 통증이 찾아왔을 때 적당한 대처법을 찾는 일. 가족이 없는 곳에서의 나는 마치 손발이 묶인 듯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여행지에서 홀로 겪는 나의 일상생활은 내가 이미 뛰어넘은 '진로변경'이라는 모험보다 어쩌면 '더 큰 모험'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다른 여행객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만 장애를 겪는 건 아니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겪은 '장애의 원인'이 모두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도 여행을 오기 전까지는(부모님과 동생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 도움을 통해) 내 장애로 인한 불편을 크게 느끼지 못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덕분에 나 홀로 떠나온 여행길 위에서야 겨우 내 장애가 날 참으로 많이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의 한 평생 인생도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인생길 위에서 갖은 장애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며, 그 장애상황을 적절히 잘 해결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의 힘만으로 장애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전기·수도·도로·대중교통·치안·의무교육·복지정책 등 우리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군 자산'으로부터 시시각각 숱한 도움을 받으며 다양한 장애상황들을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 사회적 자산이 미치는 '도움의 질'이 사람의 부류마다 다르게 결정되어 있다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잘 못 살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내 가족을 위해, 내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한 발짝 더 영리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라 규정하는 사람들이 겪는 '장애 상황'은 과연 모두 '그들의 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을 미처 마련하지 못한 '공동체의 미숙함'인가? 우리 사회가 그저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급급했던 시절을 지나, '어떻게 하면 Well-Being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이 질문에 진지한 자세로 대답을 강구해야만 한다.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웹진 통(通) 49호 [똑바로보기] 코너

원문 : http://bit.ly/1H9FFOX

번호 제목 날짜
84 오염, 위치, 성스러움에 대한 단상 file 2024.01.01
83 [공지] 홈페이지 서버 및 도메인 이전 완료 안내 (gyool.net → gyool.kr) file 2023.09.03
82 요즘 세상 돈 이야기 (4) _ 물가는 오른다는데 아파트는 왜 떨어지나? file 2022.11.04
81 요즘 세상 돈 이야기 (3) _ 킹달러 file 2022.11.04
80 요즘 세상 돈 이야기 (2) _ 물가는 갑자기 왜 오르고, 금리는 왜 올리는가? file 2022.11.04
79 요즘 세상 돈 이야기 (1) _ 옛날(?) 양적완화 이야기 file 2022.11.04
78 그 날이 오면 : 미얀마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file 2021.03.08
77 무학의 통찰인척 하는 그냥 잡설 : 생각과 닫힌계 2020.12.11
76 수신 폭증이라는 기사들에 대해 2020.07.28
75 정의로 가는 길 : 시국에 부쳐 _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삶과 노동> 2019년 겨울호 2019.12.09
74 김현종 국가안보 2차장이 미국에 중재요청을 하지 않은 이유 2019.08.12
73 시대의 상식, 정리하고 갑시다 2019.07.23
72 공감능력은 지능순 : 세월호 참사 5주기에 부쳐 2019.04.17
71 내가 남북미 대화의 행간을 읽는 법 file 2018.06.15
70 지방선거 간단 감상 2018.06.14
69 6.12 북미합의 환영, 짧은 소감 2018.06.12
68 갑을유감 : 스마트폰 AS센터에서 겪은 일 2018.05.10
67 예술, 자본주의, 나에 대한 잡스러운 생각 2018.04.29
66 대통령 헌법 개정안(中 총강 및 기본권)에 대한 개인적 평가 2018.03.20
65 2018년 최저임금 타결을 환영하며 2017.07.16
64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구속기각? 기소? 구형? 양형? 2017.04.18
63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압도적인 탄핵소추안 가결 ! 이제는 헌법재판소다 ! 2016.12.09
62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탄핵정국, 어디로 갈 것인가 ② : 가결 시나리오 2016.12.06
61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탄핵정국, 어디로 갈 것인가 ① : 부결 시나리오 2016.12.05
60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2일 탄핵안 상정 불발, 무슨 의미인가 2016.12.01
59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박근혜 3차 담화, 하야선언인가 아닌가? 2016.11.29
58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친박 중진들의 하야 권고, 어떤 의도인가 2016.11.29
57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법무부장관과 민정수석의 사의는 어떤 의미인가 2016.11.29
56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시국상식 용어사전 2016.11.23
55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세월호 7시간, 왜 중요한가 2016.11.21
54 [ 뉴스 읽어주는 남자 ] 별도 특검 합의 = 촛불의 장기전 돌입 2016.11.14
53 우리는 이 깊은 오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016.09.09
52 장애인을 ‘평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_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삶과 노동> 2016년 가을호 2016.09.04
51 말과 글은, 생각나는대로 내밷는 것보다 2016.07.08
50 한때는 패션, 한때는 외모, 한때는 돈, 한때는 지식, 한때는 어떤 사람. 2016.07.01
49 AlphaGo의 승리와 인간의 우려 2016.03.10
48 역병은 대증요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_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삶과 노동> 2016년 봄호 2016.02.21
47 TV 뉴스에 당신의 돈이 지불되고 있다. _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삶과 노동> 2015년 겨울호 2015.11.01
46 소통, 다양성, 그리고 장애 _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삶과 노동> 2015년 가을호 2015.09.04
45 개혁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지 '빼앗는 것'이 아니다. 2015.08.27
44 남북 공동 보도문에 대한 논평 : 준전시상태 그리고 524조치 2015.08.24
43 고도화된 자본주의 속 인간의 자화상, 그리고 공동체 - 멘사코리아(Mensa Korea) 회지, 2015.06.01. file 2015.06.01
42 다수의 폭력적 오해와 몰이해, 차별! 2015.05.28
41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하는 순간 자유는 또 하나의 상품이 된다 2015.05.11
» 여행 같은 인생, 그리고 '우리의' 장애 _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웹진 <통> 49호 2015.04.10
39 장애사회인 다섯명의 직장생활의 이야기 _삶과 노동 2014년 가을호, pp.10-14 file 2014.10.30
38 성형괴물 같은 우리의 '가상외모', 싫어요(Hate it) _100Tong 2014 가을호, pp.4-5 file 2014.10.12
37 장애인 고용에 관한 지원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해 _삶과 노동 2014년 여름호, pp.10-15 file 2014.07.20
36 우리 함께 '불편함'을 이야기하자 _100Tong 2014 여름호, pp. 4-9 file 2014.07.13
35 공동체 : 빼앗긴 내 인격을 되찾는 길 file 2014.03.31
34 숙제같은 공동체, 목적으로서의 공동체 _100Tong 2014 봄호, pp. 16-19 file 2014.03.20
33 "진짜 가치를 쫓아 사는 삶", 한국장애인재단 계간지 <틈> (2013~2014겨울호, 6호) pp. 58-61 file 2014.01.15
32 공동체 붕괴 → 브랜드+프렌차이즈 전성기 → 빈부격차의 확대 ? 2013.12.02
31 불확실성의 시대, 해답은 힐링이 아니라 비전이다 _삶과 노동 2013년 겨울호, pp.6-8 file 2013.11.01
30 이 가을, 안부를 권합니다 _100Tong 2013 가을호, pp.4-7 file 2013.10.13
29 본질에는 일치, 비본질에는 자유, 모든 것에는 사랑을 2013.09.25
28 소비주의가 심어준 환상과 우리의 꿈 2013.09.21
27 결혼에 대한 단상 [왜 청춘은 힐링에 열광하는가 시리즈] [3] file 2013.07.04
26 외로움에 대한 단상 [왜 청춘은 힐링에 열광하는가 시리즈] file 2013.07.04
25 왜 청춘은 '힐링'에 열광하는가 file 2013.06.23
24 다원주의-상대주의의 맹점과 기독교 file 2012.09.19
23 민주주의 국가의 유권자가 될 것인가? 양심적 자유를 파는 상품의 소비자가 될 것인가? file 2012.09.19
22 최근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무학의 통찰(이라고 쓰고 잡생각이라고 읽는다) [1] file 2012.09.19
21 [경제/정치] 한순간에 13조 빚쟁이가 되어버린 국립대 (서울중앙지법의 기성회비 무효 판결에 대해) file 2012.01.28
20 말장난으로 왜곡된 무상급식 논의 file 2011.08.22
19 내성이 생긴 것인가, 역치가 높아진 것인가? 2009.12.14
18 ▦ 기어코 찾아올 내일, 그리고 또 내일. file 2009.05.29
17 ▶◀ 노무현 전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file 2009.05.24
16 일은포(日銀砲)사건과 강만수의 환율개입 [9] [2] file 2009.01.26
15 이대통령의 진심이 담긴 라디오 연설. (용산참사에 대해서) [1] file 2009.01.24
14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내정 [1] [1] file 2009.01.22
13 사임한 어청수 경찰청장 후임 김석기 프로필 [1] file 2009.01.19
12 창의성을 요구하는 사회, 다양성을 해치는 사회 [1] file 2009.01.16
11 국회폭력방지법? 법은 가훈(家訓)이 아니다. [2] file 2009.01.15
10 이 정부는 왜 이렇게 '부동산'에 목을 매는가 (부동산활성화 올바른 길인가) [3] file 2009.01.15
9 '5만원권 발행'의 경제적 파급과 평가 [4] [6] file 2009.01.14
8 진보와 보수, 야당의 국회 점거사태를 돌아보며 [1] file 2009.01.12
7 2009년 초, 현 경제상황에 대한 고찰 및 나아가야 할 방향 - 부제 : 리만브라더스의 실패 [6] [3] file 2009.01.08
6 경제적 파라다이스? 2008.10.02
5 개인주의, 자유, 경쟁이 선(善)이 되는 사회 2008.10.02
4 자유 vs 평등, 그리고 경제적 효용극대화. 2008.09.18
3 '희소성의 원리'의 아둔함. [2] 2008.09.10
2 광우병시위대와 정부의 대처 [1] file 2008.06.02
1 컴퓨터, 인터넷 그리고 Relationship file 2007.04.20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