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훈식 주가르(जुगा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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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인도는 러시아와 일본도 실패한 우주선 달 남극 착륙에 세계 최초로 성공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무엇보다도 더 놀라운 점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인도의 찬드라얀 3호에 투입된 우주임무 비용이 총 7500만 달러(약 970억원)란 점이었는데, 우주영화 인터스텔라의 제작비용이 1.65억 달러(약 2,130억)였다는 점을 상기해볼때 우주영화 반도 못 찍을 돈으로 영화 같은 실제 우주임무를 성공해낸 셈이니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런 초 가성비의 인도기술력을 두고 여러가지 근거들이 주장되었지만, 매우 낮은 1인당 연간 GDP(약 2천달러)로 인한 낮은 인건비,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와 극렬한 경쟁체제에 바탕하는 최우수 인재풀 등이 주요 설명으로 납득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빠지지 않는 설명이 있으니 바로 인도인들의 특징적인 행동양식인 '주가르(जुगाड़, Jugaad)'다.
주가르를 의역하면 '제한적인 자원과 환경 내에서 목표를 어떻게든 이루어 냄' 정도인데, 우리나라로 따지면 '안되면 되게하라!'의 정신이 깃든 전 국민적인 행동양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뭐, 말로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구글에 india jugaad 라는 키워드로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한방에 이해가 된다. 오토바이에 판자를 길게 달고 양 끝의 무게중심이 맞도록 승객을 태우는 방식으로 7인용 택시로 개조한다거나, 오토바이 모터에 쟁기를 달아 농기구를 만든다거나, 자전거 앞바퀴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마트 카트를 달아서 편리한 수송 수단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주가르의 정신은 비단 이런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어서 세계 최고 IT회사들의 인도출신 CEO들이 자신들의 성공비결로 주가르 정신을 언급하기도 하고, Jugaad Innovation (국내 번역서 제목 <주가드 이노베이션>)이라는 책이 출간되어 세계적인 이목을 끌 정도로 그 효용성과 정신이 널리 알려지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내가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유튜브로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강성용 교수님의 영상을 덕질하는 것에 그치는 수준이지만, 이 주가르라는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낯설지 않았던 것은 내가 인생을 이끌어온 방식이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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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과 욕심이 많은 천성에 떼레야 뗄 수 없었던 가난과의 인연은 박재훈만의 주가르를 낳았다. 내 욕구와 필요가 발생했을 때 단순히 포기하거나 욕구를 제한하기보다, 눈 앞에 보이는 제한적인 자원과 환경들을 최대한 절약하고 활용해서 어떻게든 원하는 바를 비슷하게라도 이루어내는 생활양식이 체화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가족의 경제력만으로는 온전한 감당이 힘들었던 내 병원비라든가 대학학비라든가 하는 나의 중요한 필요들이 좌절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친인척과 교회공동체 등을 통해 기적적으로 해결해 온 감사의 이적들이 내 삶의 타임라인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는 것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이를 먹고 얼마간의 평균소득을 확보한 후에도 이런 행동양식은 쉽게 변하질 않아서, 나는 다양한 IT+전자기기·상하수도·자동차 등의 조립·수리·하드웨어·소프트웨어에 관한 얇고 넓은 실무 지식, 11년째 1원도 틀리지 않고 작성해 온 엑셀 가계부, 남들보다 평균 3~40% 이상 저렴한 인터넷 최저가를 찾아내는 쇼핑 검색력, 시간·돈·공간의 이용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면 어김없이 스스로를 질책하는 엄격함, 중고거래 당근마켓 매너온도 90도를 보유한 독특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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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박재훈식 주가르를 구구절절 언급하는 이유는, 이번에 쌍둥이를 출산하고 양육을 하다가 좁은 집의 한계를 느껴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동안 불편을 느끼면서도 인내하거나 부족한 대체제로 갈음하던 부분들에 대해 큰 맘먹고 큰 소비들을 단행(?)했는데, 최근 그 소비의 결과가 가져오는 단맛을 아주 크게 느끼게 되면서 오히려 역으로 그동안 내가 삶의 기준처럼 지켜왔던 박재훈식 주가르를 되짚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큰 소비들이라 함은 임대이긴해도 (내 인생 역사상 가장 넓은 집인) 25평대 집을 구한 것, 드럼세탁기+건조기세트, 최신사양 컴퓨터, (꽤나 대규모의) 팬트리 수납장, (아직 배달이 오지 않은) 식기세척기 같은 것들이다. 나로서는 아마 아기들이 없었다면 시도도 상상도 하지 않았을 소비들이었는데, 아기들 덕분에(?) '소비가 가져다주는 급격한 삶의 질 상승'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경험은 기존의 박재훈식 주가르에 더해져서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집에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생겼을 때, 과거의 나라면 그냥 인내하거나 혹은 집에 있는 물건들로 어떻게든 임시방편으로 처리하고 살았을 부분들을, 이제는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성비 있는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다이소나 인터넷 쇼핑으로 자재를 구매해서 집을 수리하는 식이다. 이걸 보고 '이게 주가르랑 뭐가 달라?'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과거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소비를 극단으로 줄이는 것'에 초점을 맞췄을 텐데, 이제는 '적절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통해 어느정도 환경을 갖추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더 효율적인 것'이라는 내적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큰 변화로 느껴지지 않을 순 있지만, 나에게는 아르키메데스적 깨달음에 준하는 패러다임 시프트다. (하하)
사실 이러한 변화는 나이를 먹고 아기를 양육하면서 시간과 체력과 건강의 부족(고갈)을 크게 느끼는 것에서도 기인한다. 단순히 내 시간·체력·건강을 화폐의 축적과 맞바꾸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게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삶의 구석구석에서 '극단의 효율'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으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가진 능력과 환경의 상수들이 변모함에 따라 실생활에 적용하는 함수를 변경한 셈이랄까. 그러니 과거는 과거대로 그때가 옳았고, 지금은 지금대로 옳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요즘의 나는 아기들과 이사를 맞아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내 삶의 새로운 변화를 즐겁게 체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