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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ol's Universe

Review & Memo

평화. 슬럼프.

2023.09.10 00:04:01

[ 평화. 슬럼프. ]

 

내 운전경력 19년만에

도로 위에서 내 과실로 일으킨

첫 교통사고가 시작이었다.

 

그 다음엔 침대 앞에서 쏟은 이물질이

침대 밑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가면서

침대를 모두 들어내는 대청소를 해야했다.

 

이후에도 이해할 수 없는

불운과 자잘한 실수는 이어졌다.

 

수백번의 거래에도 사고 한번 없었던

중고거래 사기를 당했다.

다용도실 수납장을

모두 들어내는 대청소를 해야했다.

오랜시간을 들여 작업해놓은

파일을 클릭실수로 날려버렸다.

지인을 차에 태워주다

승차확인을 못하고 출발할뻔해서

뒷바퀴로 지인의 발등을 밟았다.

부엌 찬장에서부터 쏟아져나와

싱크 바닥까지 흐른 간장을 닦아내야 했다.

거하게 준비하고 조리를 끝마친

저녁 메인 요리를 모조리 버려야 했다.

내비를 켜놓고도 길을 잘못들어

수십분을 돌아가야 했다.

심지어 연료가 바닥나는 중인데

신용카드도 현금도 없고

휴대폰 배터리도 모두 나갔는데

자동차 수리 중 대차받은 차여서

폰 충전도 불가능한 상황.

도착까지 가슴 졸이는 일 말곤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 외에도 언급하기조차 민망하고 어이없는

자잘한 불운과 실수가 매일 일어났다.

 

정서적인 공황상태가 이어졌다.

발걸음 하나 조심히 떼며 지내보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인과로 이어진 사건들에

실망과 자책만 반복될 뿐이었다.

 

온유와 내 친구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실수하며 살아간다 위로해주었지만

수긍가는 빈도가 아니었다.

 

또 다른 분들은

아이들의 탄생을 앞둔 호사다마라 하였고,

과연 그런 일이라면 기쁘게 감당해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브레인 포그같은 이 막막한 상황을

타개할 시원한 묘수는 보이질 않았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다만 기도하라 말씀해주셨다.

 

기도야 매일 하는 일이라지만

언젠가부터 정형화 된 내 기도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거북한 요즘이긴 했더랬다.

 

온유와 나는 손을 잡고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겪는 삶의 날 것과 가치관을 위해 기도했다.

그 이후에도 괴이한 불운은

며칠간 더 이어졌지만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렇게 지난한 한 달이 흘렀다.

그리고 요 며칠,

끝날것 같지않던 이상한 일들이 그쳤다.

 

게다가 오늘은 올해들어

컨디션이 가장 좋은 날인것 같다.

 

되돌아보면 사실,

내 삶 대부분의 시기는

슬럼프라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역경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참호도 없는 전쟁터 한복판에 선

벌거벗은 아이같은 기분으로 살아온 날들이

아직도 내 기억을 새카맣게 채우고 있다.

 

그러던 내가 나름의 터전을 갖추고

평화로움을 누리게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느덧 작은 사건사고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안전한 자는 필히 나약한 자요

인생의 성장은 결핍이 주도한다 했던가.

 

성장이 인생의 지상목표는 아니지만,

나약함의 결과는 피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일련의 사건사고를 통해

(나를 포함해서) 다친사람은 없었고

모든 상황은 대부분 온전히 마무리가 되었다.

 

그저 한동안 이어진 불면과 스트레스로 촉발된

장기간의 몸살과 컨디션 난조,

얼마간의 경제적 손실이 전부였다.

 

그렇다. 계속 불평만 늘어놓았지만,

결국 모두 해결할 만한 일이었고

그 과정 속 나는 안전함 가운데 있었다.

 

아주 오랫만의 긴 터널이었고, 이제 그 끝이 보인다.

하지만 이 터널이 마지막 터널일 것이란

얼토당토않은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그간 내가 누린 평화와 안전에 취해

잃어버렸던 손전등을 되찾고

좁은길도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음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감사한다.

수정한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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