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 ]
한국남동발전(주) 분당화력본부 박재훈
대학 졸업직후 벤처창업가로 일하던 내가 공기업 직원이 된지도 벌써 3년이 되었다. 그리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3년동안 나는 조직 속에서 수많은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왔다. 게 중에서도 학창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절차의 중요성'이라든지 '성과만큼이나 중요한 근거와 명분의 실효성'과 같은 것들을 체득한 일은 내가 공기업 직원으로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것들'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업무를 반복하며 살다보니, 이제는 그저 일을 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내 가치관까지도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느낀다. 일상생활 속 사소한 결정에도 '증거와 근거'를 찾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물론, 작은 말 한마디와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개인의 책임을 요구하는 시대이자 세상의 구석구석이 모두 제도화되는 시대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만큼, 이런 식의 체질개선은 시대정신을 반영한 '좋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을만큼 '옳은 것'일까하는 생각에는 쉽게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어느 날, QT 중에 얻은 울림이 있어 지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그에게로 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은 모두 참되다." [42] 그 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 요한복음 10장 40~42절, 개역개정
정말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믿음이 저런 형태의 믿음일까? 눈으로 보고난 후 확신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앎'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앎이 아닌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주지의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피조물과 함께 영원히 기쁨으로만 존재하는 상태(=천국)에 이르는 것'에 자유의지가 필요충분조건인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은 불완전한 존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앎'은 논리와 증거를 전제로 하지만, '믿음'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창조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셨고, 우리에게 사랑의 증표로서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의 근간이 되는 '사랑', 다시 말해서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나면, 자기만족을 위한 도덕률로서의 신앙이라든가 자기이익을 위한 기복적이고 도구적인 신앙이 왜 성공에 이를 수 없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사랑'과 '믿음'의 관계가 이성간의 사랑이라든지, 가족간의 사랑이라든지, 신앙인간의 사랑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 삶을 되돌아보는 또 하나의 지평이 열린다. 어느샌가 우리는 각박한 세상을 살며, 사람들에게 '증거와 명분'을 요구하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단 한 가지, '사랑'을 이루는 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명령이자 명분이라면, 우리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모든 존재와 사랑의 원천되시는 하나님 앞에 고개숙여 잠잠히 여쭈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