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희망방송 간증수기 공모전, 3등 수상.
<석탄으로 빛을 만드는 광부의 아들>, 박재훈
"재훈아! 정훈이 데리고 초롱이네 가서 점심먹고와!"
내 유년시절, 부모님이 싸우시고 별거하시는 일은 가족 외식보다 더 잦아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어미가 배아파 낳은 두 아들을 버려두고 집을 나서기를 즐거워하겠으며, 어느 아비가 밥을 얻어 먹으러 온 아이들을 보면 단번에 사정을 꿰뚫어볼 것이 뻔한 옆집에 아이들을 보내며 창피함을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모가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가난의 터널이었다.
내 아버지의 유년시절은 나와는 반대로 매우 풍족했다. 할아버지는 경남 진주에서 당대 손에 꼽는 부자였다. 아버지는 자전거 한 대의 가치가 지금의 웬만한 자동차 한 대 보다 더 귀하던 시절에 자전거로 등하교를 하셨고, 흑백 텔레비전 조차 귀하던 시절에 칼라 텔레비전을 보며 사셨다. 그런 아버지가 진주에서 대학을 졸업하자,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함께 대전에 올라가 사업 확장을 꾀하셨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주시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대전에 올라가신 아버지는 그 곳에서 어머니를 만나셨고, 얼마가지 않아 백년가약을 맺으셨다. 건강한 몸과 풍족한 돈, 아름다운 아내, 평생이 보장된 것 같은 미래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 내 아버지의 인생에는 거칠 것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모든 인생사가 여느 동화책의 마무리인 'Happily Ever-!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처럼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혼 후 별 무리 없이 첫 아들을 갖게 된 아버지는 이내 곧 사업실패라는 거대한 벽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는 그 길로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으로 들어가셔야 했다. 처자식을 먹일 방편이라면 찬물 더운물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탄광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첫째 아들을 마음에 묻어야 했다. 그리고 첫째의 묘지 위에 풀이 제대로 나기도 전에 태어난 둘째 아들(필자)은 첫 돌을 맞기도 전에 1주일 시한부 선고를 당한채로 병원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사업실패와 첫 아들의 사망, 그리고 둘째 아들의 시한부 선고. 어떤 막장 드라마가 이토록 처절한 비극을 써낼 수 있겠는가. 철들 틈 조차없이 평생을 풍족하게 살아왔던, 유산을 물려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탄탄대로일 줄 알았던 서른남짓의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인생이었으리라. 그때부터 아버지는 하루 담배 두 갑과 소주 한 병을 매일 끼고 사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우리 가정의 상황을 대표하는 수식에는 줄곧 '가난'이 맨 앞에 놓이게 되었다.
부모(내 외조부모)의 지원 한 푼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대학에서 어렵사리 성악전공을 마친 꿈많은 처녀였던 어머니는 결혼과 동시에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시절 여느 집안처럼 가부장적이었던 시댁은 어머니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쳤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으리라. 어머니는 교회 청년부 임원경력도 있는 탄탄한 크리스천이었으나, 시댁은 뼛속까지 단단한 불교집안이었다. 가족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뻔질나게 절을 드나들었던 할머니는 본인 아들(내 아버지)의 인생이 꼬이는 것은 모두 서양귀신(크리스천, 내 어머니)이 집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며 언성을 높이시기 일쑤였다. 현실적으로 감당해야할 문제들도 산적해 있었던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이도저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은 더 깊은 시름을 낳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막같은 경제사정을 조금이라도 해갈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광부생활도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얼마가지 않아 그만두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매듭을 열심히 풀고 풀어도, 푸는 동안 더 많은 매듭이 묶이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소아암 수술 후 1주일 시한부 선고를 당했던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며 '소소한 기적'이었다. 물론 살아남은 몸뚱이에 들어간 막대한 병원비 덕분에 우리 가족이 '깊은 가난'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은, 나의 생존을 두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까닭이었다.
시한부 선고에서 살아남은 이후 왼쪽다리에 장애를 지닌 채 살아온 나는 잔병치레도 참 잦은 편이었는데, 어머니는 이런 나를 없는 살림에도 최선을 다하여 극진히 보살피셨다. 나이 서른을 먹은 지금까지도 그 버릇이 남아 어머니 앞에서는 내 손으로 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단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주일엔 아프더라도 일단 교회에 가서 아파야 한다'였다. 그러한 어머니의 교육 덕분이었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퀴즈대회와 성구암송대회가 열리는 족족 1등상을 타오는 '모범 새싹 크리스천'이었을 뿐만아니라,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는 항상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는 ‘비범한 꼬마 크리스천'이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런 장래희망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 채였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3학년생으로 자란 나는 어머니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다.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살아남게 된 이면에는 어머니께서 나를 하나님께 서원하신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동안 어딘가 비어있었던 퍼즐을 찾아 끼워넣은듯 했다. 그 이후로부터 내 삶의 방향이 주님을 향해 더욱 공고히 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목사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솔직히 어떻게 해야 목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없는 살림에 학원을 보낼 여력이 있을리 만무하니 '대학'이란 것을 꿈꾼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모님께서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시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난 서울강북 하위권 학교를 다니며, 매번 벼락치기로 중위권을 겨우 유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던 나에게도 남들이 겪는 것과 같은 고2-고3의 시절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는 내가 비로소 나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부딪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 이제 진짜 목사님이 되려면 무언가를 해야하는 시기가 왔구나"
그제서야 난 주변 목사님들께 조언을 구하며 내 꿈을 이루는 현실적인 방도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바로 ‘대학을 가는 것’. 대학을 가지 않고서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내 인생 최초로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쉽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도전이었다. 대학을 가야겠다고 맘먹었던 고2 때 당시 내 수능 모의고사 성적은 6등급(전국단위 100명 중 약 77등)이었고, 워낙 공부를 해본적이 없다보니 집에는 쓸만한 책상하나 제대로 된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말고는 다른 장래희망을 가져본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막다른 길에 놓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그 막다른 길에 닿은 이후 1년 간, 내 인생을 뒤집는 가장 큰 터닝포인트를 온몸으로 겪게 된다.
나의 성장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문과로 옮기는 것을 반대했던 고2 담임선생님 덕분에, 나는 고3시절 내내 이과에서 혼자 독학으로 문과공부를 해야했다. 더 이상 불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할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꿈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밟힌 잡초가 일어서듯 어려운 상황들을 더욱 의지적으로 타개해나가며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문과 공부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 학원 강의를 들었고, 인터넷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의 눈에 들어 인터넷 게시판 상에서 조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수강료를 해결했다. 좁은 집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것이 부모님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 같아, 아버지가 일하시던 곳의 지하 창고에 전기히트패널과 텐트를 설치하고, 그 곳에서 1년간 생활하며 공부했다.
그리고 그렇게 동기와 의지를 갖고 뚜렷한 목표의식 아래 추진한 내 공부는 단기간 내에 눈부신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고2 겨울방학 때 모의고사 6등급으로 시작한 내 성적은 고3 첫 모의고사에서는 4등급, 여름방학에는 3등급, 2학기에는 2등급으로 상승하였고, 마침내 본 수능에서는 1등급을 성취,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 최종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한 말로 인간의 노력과 계획만으로는 이루어내기 힘든 결과였다. 나는 하나님께 무한의 감사를 올려드렸고, 인생의 길을 주께 향하고 맡겨드릴 때 주의 도우심이 '분명히' 함께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게다가 이 경험은 시한부에서 살아남은 경험 이후 두번째 경험이었다.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는 더욱더 다짐했고, 주님의 존재와 일하심을 재차 확신했다.
나는 이렇듯, 시한부에서 보너스 삶을 허락받은 이후 한번 더 큰 보너스를 얻었다. 대학진학은 '장애인'이란 아이덴티티 이외의 어떠한 사회적 역할도 허락되지 않던 나에게 수많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마음껏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행복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집안사정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하느라 가세는 크게 기울었고, 결국 내가 대학 2학년이 되던 해에 부모님은 다시한번 내 학비로 인해 크게 다투신 후 별거를 하시게 되었다.
두 분의 별거 기간동안 용돈을 받아쓸 염치가 없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학비를 매우고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밥을 얻어먹으며 생활해야했다. 불규칙하고 온전하지 못한 식사 덕에 만성적인 장염과 위염에 허덕이는 삶을 산지 6개월. 그렇게 몸관리가 엉망인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자, 평소 상태가 좋지 않았던 오른쪽 다리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오른쪽 무릎아래를 절단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급박하게 병원으로 달려가 내 오른쪽 다리를 자르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의사는 오늘 절단하지 않으면 폐혈증으로 급사할 가능성도 있다하였고, 나는 대안을 고민할 겨를 없이 그 길로 긴급 수술 일정을 잡아 바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하반신 마취를 한채로 누워있었던 내 배 위에는 하얀 커튼이 쳐져 있었다. 흰 커튼 너머에는 비릿한 전기톱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한동안 윙윙 거리는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하더니, 이내 곧 툭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내 오른쪽 허벅지가 가볍게 튀어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 쓰레기 봉투에 담기는 듯한 비닐 파열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상황판단을 미뤄둔 채, 외면하듯 잠에 빠져 들었다.
눈을 떴을 땐 다음 날 아침이었다. 병실에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마 화장실에 가신듯 했다. 나는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켜야겠다며 리모콘을 집으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하릴없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다리가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었다. 비참하게 주저앉은 나는 내 다리를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다리의 절단면은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지혈제만 발라둔 채 봉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내 몸만이 아니었다.
나는 탄광촌에서 시한부를 벗어날 때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난 그 사실을 알기 전부터 목사님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운명적인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그 서원의 결과이자 증표로, 내가 서원의 길을 걷고자 결단하였을 때, 서울대 입학이라는 말도 안되는 성과를 선물로 받지 않았는가? 그렇게 나의 미래는 신앙 안에서 완벽한 보호를 받는 '그 어떤 것'이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못 믿을 것이 없었다. 이미 주께서 나에게 두 번이나 증거를 보여주시지 않으셨던가? 하지만 그랬던 나는 지금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간 채 침대 아래에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다. 과연 ‘주님’이 정말 계시는 것인가? 나의 서원을 받으시고 서울대 입학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내 다리를 자르도록 허락하셨단 말인가? 정말 그 동일한 하나님이 내 부모님을 별거하게 하시고 나를 6개월 가까이 걸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셨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에게 더 건강한 몸과 좋은 환경을 주고싶어 안달이어야 정상일테니 말이다.
그렇게 침대 아래에 30분을 앉아서 울며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찬송 한 곡이 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수십년간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을 앉은 자리에서 30분 만에 싸그리 씹어먹어 치우고 있는 멍청한 나를 그냥 두고보실 수 없으셨던 성령님께서 뒤통수를 치신 것이리라. 감사하게도 그 뒤통수 한 방에 다시한번 모든 퍼즐이 제자리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더 큰 목적을 가지신 분이시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방민족을 멸살하는 일도, 사랑하는 독생자를 못박는 일도 서슴치 않으시는 분이다. 내가 내 다리절단을 이유로 하나님을 내 삶에서 잘라낼만큼 나약한 사람이라면, 실제 다리절단을 경험하게 해서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 제대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옳은' 판단이었으리라.
내가 이 사건을 통해 겸손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서울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 몸이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 목적이 중요한 것임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애초에 시한부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과 다를 것이 없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큰 값’을 지불하고 그만한 값어치의 ‘공평하신 하나님’을 배웠다.
그 이후 나는 대학을 다니며 ‘목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와 동행하는 삶’이 중요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여러 고민과 기도의 결과, ‘신본주의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이로움(진리)을 전하는 삶’을 내 삶의 비전으로 정립했다.
지금의 나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 벤처사업을 일으키고, 공기업에 입사해서 내가 잘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특히 비기독인들-을 배우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업에 종사하는 와중에도, 평생을 두고 정립한 비전을 놓치지 않고자, 각종 멘토링과 글쓰기, 인터뷰 등의 기회를 게을리 흘려보내지 않고 있다. 지금의 내 삶에 충분히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히 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내 기쁨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갖은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한국전력 그룹사 중 화력발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탄광촌에서 석탄 밥을 먹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내가, 지금은 석탄을 태워 빛(전기)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나의 삶을 농축한 것과 다르지 않다. 주께서 나에게 시한부와 가난, 다리절단이라는 ‘어두움(석탄)’을 주지 않으셨더라면 지금의 ‘내 기쁨(빛)’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께 무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그리고 또 앞날에 있을 ‘주님으로 인한 고난’과 ‘그로 인한 기쁨’을 기대한다.
수상작 발표 링크 : https://hmn.or.kr/hboard3/bbs/board.php?bo_table=notice&wr_id=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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