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 해답은 힐링이 아니라 비전이다.>
한국전력그룹 남동발전(주) 박재훈 (지체장애 2급)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삶과 노동' 2013년 겨울호
이 시대를 표현하는 형용들은 디지털 시대, 글로벌 시대, 풍요의 시대. 하지만 이 땅의 20~30대 청년들을 표현하는 수사들은 88만원 세대, 역사상 가장 학력이 높지만 취업이 가장 어려운 세대, 책임과 의무를 모르는 이기적인 세대, 꿈이 없는 세대, 돈의 의미와 돈을 벌고 모으고 다루는 방법을 배우기보다는 쓰는 법을 먼저 배운 소비의 세대.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時代)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문명과 세계화를 자랑하는데, 우리의 젊은 세대(世代, 지금의 20~30대)를 수식하는 표현들은 하나같이 불완전하고 가혹한 표현들 뿐이다. 경제불황이나 베이비붐 따위와 같은 외생변수들로 발생하는 취업난은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그 상황을 이겨내도록 훈련되고 무장되어 있어야 할 이 세대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우리 세대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대에 대한 평가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나는 2010년에 서울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직후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IT벤처기업을 공동창업하여 약 1년 8개월간 총괄기획자로 일했으며, 건강상의 문제로 창업기업을 떠난지 얼마 되지않아 공기업 직원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렇게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눌러 앉았을 뻔 했던' 내가 대학생과 취준생(취업준비생)을 만나 그들의 삶과 비전, 그리고 취업에 관한 고민을 나누는 멘토로서 살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 시작된 것이었다. 경제학 전공자가 IT 벤처기업을 창업한 일이나, 소위 말하는 명문대 출신 벤처창업가가 창업 2년만에 회사를 떠나 공기업 입사를 선택한 것을 흥미롭게 여긴 한 신문기자에 의해 나의 스토리가 전국일간지의 전면기사로 소개된 일이 있는데, 그 기사를 계기로 동 신문사의 취업포털사이트에 나의 삶과 취업에 대한 이야기를 수개월간 연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이런저런 직업․취업 멘토링과 강연의 기회를 얻게 되어서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을 들려줄 수 있는 귀중한 경험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남짓의 멘토링을 통해 70명 가량의 대학생과 취준생을 만나며 내가 전하고 가르쳐준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다는 점은 부끄럽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번 느껴야만 했던 답답함에 ‘뚜렷한 교집합’이 존재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내가 '멘토링'이란 이름으로 낯선 사람과 마주 앉게 되면, 나의 삶과 생각들을 간단히 들려준 후 상대에게 가장 먼저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OO씨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어요?”
참 간단한 질문이다. 게다가 ‘비전과 취업’에 대해 고민을 나누어 보자며 시간과 돈을 들여 멘토링에 참가할만한 사람이라면 저정도 질문은 한두번쯤 자문(自問)해 봤을 법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만난 70여명의 청년들 중 이 두 가지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은 사람은 두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소 빈둥대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언가 ‘열심히’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에 쫓긴 듯 바쁘게 산다. 막연하긴 하지만 취업을 위한 시험공부(또는 전공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토익공부를 하고, 이런저런 강연을 쫓아다니고, 공모전에 참가한다. 주말에는 시간을 쪼개어 봉사활동을 다닐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쯤되면 역사상 ‘가장 바쁜 백수’가 많은 시대라는 표현도 무리가 아닐 듯 하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도대체 이 ‘바쁨’의 결과물이 무엇인지, 내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불확실성’이란 단어로 간결하게 요약할 수 있다. 서점에 놓인 흔한 베스트 셀러들의 광고 카피와 텔레비전에 ‘힐링(healing)’이라는 괴상한 단어가 범람할 만큼, 이 시대의 불확실성과 그로인한 불안감은 만연하고 그 깊이가 깊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매일을 각종 ‘스펙쌓기’로 시간과 돈을 소진하며 살아간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 스펙을 쌓는다기 보다는 그저 ‘불안하기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쌓는다. 너도 나도 열심히 하는 이 길을 따라가다보면 무언가 중간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수많은 비효용을 낳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다. 사실 우리 시대는 우리 부모나 조부모 시대에 비하자면 국방·치안·도로·수도·전기·공교육·사회안전망 등 많은 것이 더욱 ‘확실’해진 시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세대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기에 ‘힐링’을 갈망하게 하는 것일까.
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비전의 부재(不在)’로부터 찾는다. 커뮤니케이션의 양은 늘었지만 실존과 온라인 간의 끔찍한 괴리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이 담긴 소식을 ‘서로 경쟁해야하는 상품’으로 전락시킨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장악하는 세상 속에서, 언젠가부터 우리 젊은 세대들은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경험하거나 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TV와 인터넷이 해주는 이야기에만 귀기울이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카더라 통신’에만 의존하게 된 것이다. 이렇다보니 TV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이 평균적인 삶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고,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베플(베스트 리플)’과 페이스북의 ‘좋아요’가 많이 달린 삶의 단면들만이 이 시대의 시금석인냥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실존하는 사람들의 삶은 정말 다양하다. 모범답안이란게 존재하기 힘든 영역일 뿐만 아니라, 각자의 ‘가치’가 다른만큼 각자의 답안이 모두 달라야 ‘정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TV와 인터넷을 통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끊임없이 학습하고 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정도는 들어가야지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효과를 보는 것이라든가, 최소한 서울에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어야만 결혼을 할 수 있다라든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가장 안정적인 길은 소위 말하는 ‘사’자 붙는 직업을 가져서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든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영어로 자기 소개는 할 수 있어야만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든가 하는 식의 ‘상식’들이 대표적인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의 예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에 계속적으로 노출되며,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형편과 실력을 한탄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독립하고 책임지는 일에 대해서 꺼려하게 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사실 이 세상에 그런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 내용들이 말하는 것을 이룬다 한들, 스스로 즐거워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성공’이겠는가. 그야말로 배고픔과 배부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차원의 고민을 하면서도, 당장 손에 쥐고 있는 먹고사는 일을 포기하지 못해서 괴로운 나날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과연 남들이 그 삶을 성공이라 평가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것이 성공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기에 불확실성을 종식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비전’의 확보이다. 무엇이 당신을 평생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인생의 과정 중에 언제든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는) 실패 후에도 당신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이 과연 무엇인가, 직업이나 돈 따위를 삶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가 과연 어떤 것인가. 직업을 고민하기 이전에ㅡ 삶의 큰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ㅡ 우리는 먼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남들보다 느리거나 빠르게 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빠르더라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달려간 길은 결국 언젠가 되돌아야 와야할 짐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경제학과 출신 IT 벤처창업가’이면서 ‘벤처를 그만둔 공기업 직원’이다. 하지만 이런 독특한 이력의 이면에는 흔히들 상상할 수 있는 ‘대박 신화를 노린 로또식 도전’과 ‘실패 이후 정신차리고 자리 잡은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가치관은 전혀 담겨있지 않다. (지면이 짧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줄 수는 없지만) 오히려 남들이 쉽게 읽지 못하는 ‘내 삶의 목적을 이루는 일관된 여정’이 담겨 있을 뿐이다.
내가 ‘멘토’로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나의 사회적 성취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내 또래만 둘러보더라도 나보다 더 뛰어난 사회적 성취를 이룬 사람은 ‘발에 체일만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오늘도 타인의 삶과 비전에 대한 고민을 듣는 멘토로서 사람들을 만나며, 기쁜 마음으로 나의 생각을 나누고 내 삶을 소개한다. 이것이 ‘남들이 말하는 (말만 있고 실존하지는 않는) 성공’이 아닌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내 삶의 성공’을 이루는 유일한 왕도임을 하루하루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삶과 노동' 201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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