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화된 자본주의 속 인간의 자화상, 그리고 공동체
박재훈(www.gyool.net)
○ 책읽는사람들 대표
○ 비전멘토 및 강연자, KBS라디오 DJ
책모임 운영하며 함께 책을 읽고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 벌써 5년째. 나는 시간이 더할수록 공동체의 중요성을 재차 깨닫고 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개인주의는 '독립된 인간(자아)'이 발견된 르네상스(14~15세기)로부터 촉발되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18세기)을 거치며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서로 상관없을 것만 같은 개인주의·공동체와 자본주의·돈(화폐)간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자아'를 발견했다는 기쁨에 휩싸였다. “내 인생의 주인은 곧 나”라는 세상의 가르침은 내용의 사실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달콤한 것이었으리라. 사람들은 그 기쁨에 도취되어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예술품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전 사회에 걸쳐 '분업화'가 일어나면서 개인(인간)의 가치가 '산업의 부품' 쯤으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그렇게, 르네상스가 자랑하던 '자아의 가치'는 결국 '자기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얼마나 도덕적인지- 얼마나 정직한 사람인지- 어떤 생각과 비전을 갖고 사는 사람인지로 평가되기보다는, 거대한 산업구조 속에서 어떤 부품으로 기능하고 있는가(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상품 또는 서비스를 생산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분업화가 고도화 된 사회 내에서 '한 사람'은 고작해야 몇 가지 상품을 생산하는데 일부 기여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재화를 조달하기 위해 '화폐'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화폐의 등장이 분업화만큼이나 인간의 인격상실을 급속도로 촉진시켰다는 점이다. 처음 화폐는 '교환의 도구'로 등장하였지만, 이내 상품은 물론 '사람의 가치'까지도 계량적으로 평가하는 위치에 이르렀다. 또한 '관계적·주관적'이던 사람들 간의 거래는 화폐를 이용한 '계량적·객관적' 거래로 치환되었고, 이를 통해 거래 속에서 '사람과 관계'는 사라지고 '화폐-상품-화폐' 간의 교환만이 남게 되었다.
이런 시장경제(화폐경제)가 급속도로 확대되어 언젠가부터 명실상부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작동하게 되면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시장경제 내에서 누구나 돈만 많이 가지고 있다면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반대로 돈이 아무리 많았었다 할지라도 모든 돈을 다 써버린 인간은 '가치가 폭락'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체계 속 '인간'은 상품거래를 위한 하나의 조연일 뿐 어떠한 영속적인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사실 우리가 쓰는 돈은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체계 내에서 '공동체'는 어떠한 기능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공동체는 '계량화·객관화'를 방해하고 화폐의 기능을 제한하므로 시장경제에게는 걸림돌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종착점에 (가장 느슨한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국가 간의 장벽마저 무너트리는 시도(FTA 등 자유무역협정)가 있다는 점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돈을 쫓아 사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를 이야기하면 콧방귀 뀌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인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공동체 붕괴가 '가치가 실종된 배금주의의 만연'에만 기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동체성을 무시한 개인주의적인 경제정책이 낳는 빈부격차의 확대, 인간성 실종으로 인한 살인‧강간 등 강력 범죄율 증가, 개인주의의 반작용이 낳은 우울증‧자살율‧이혼율‧고독사 증가, 인간관계 네트워크의 약화로 인한 매스컴 권한의 비대화와 정치의 부패 등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고질적이고 악성의 문제들이 공동체 붕괴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유명 서점들이 계산대 앞에 늘어놓은 자기개발서들의 띠지에 적힌 카피 키워드를 보면 '당대의 키워드'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2013년부터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은 키워드는 단연 '힐링'. 잠깐 팔리다 말 흔한 베스트셀러, 싸구려 인터넷기사, 그저 트렌드에만 편승해서 사람들의 도마에 잠깐 오르고 사라지는 문장과 TV프로그램의 멘트들 속에 '힐링'이 범람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고학력 세대이면서도 역사상 가장 저 취업률에 허덕여야만 하는 세대. 그러면서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여유로운 시대(열매와 거품의 시대)를 살았던 부모세대를 가진 이유로 이해받지 못하고, 적절한 멘토조차 찾기 힘든 세대. 이 세대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그 '힐링'이란 단어로 포장되어 돌아다니고 팔리는 이야기들의 내용에 있다.
과연 사람들의 상처가 그저 취직과 돈 때문일까. 나는 이 시대의 상처가 경제적 문제가 아닌 핵가족화와 그로인한 관계의 파편화(개인주의화)로 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 세대는 외롭다. 지독하게 외롭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섞이기를 거부한다. 게다가 부모와 우리 세대 간의 갈등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만큼 골이 깊다.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최근 십수년동안 급격하게 진행되어 '일처리와 사고의 방식'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사회 각 분야의 디지털화도 세대 간 간극을 넓히는데 한 몫 했다.
그렇다보니 우리 세대는 축적된 사회적 담론 위에서 시작하는 깊은 고민, 인생의 멘토로부터 배우는 깊이 있는 대화, 살을 부대끼는 커뮤니케이션의 경험을 통해 인생을 배우기보다는, 그저 보이는 것을 통해 체득하고 적응하며 살아야만 하는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더구나 이런 환경 속에서, 인터넷을 필두로한 미디어의 홍수는 볼 것은 많으나 정작 볼 만한 것은 없는 변태적인 상황마저 조장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인생'을 완성하기에 급급한 삶을 살게 되었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차, 좋은 집, 있어 보이는 취미생활, 문제없어 보이는 사생활. 그것들이 왜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것들을 정말로 좋아하는가도 중요하지 않다. 사실 왜 필요한지 물어볼 데도 없다. 그저 내가 그것을 성취하고, 남들로부터 부러워함을 느끼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런 가치관 이 장악하는 삶 속에서 연애와 결혼마저도 그럴싸한 인생을 완성하기 위한 '또 하나의 스펙'으로 여겨진지 오래되었다.
모두 비슷한 목적의 삶을 살다보니 주변사람들마저 '인생의 동반자'가 되기보다는 그저 '경쟁자'이며 '비교대상자'가 되기 일쑤다. 성취에 실패하면 자괴감과 함께 인생무상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게 되고, 성취에 성공하더라도 그 성취로 인한 주변사람들의 값싼 부러움의 약발이 떨어지면 부러워하던 사람들을 경멸하며 알량한 나르시시즘으로 더 깊은 허망함에 빠지게 되는 것은 결정된 수순이다.
이렇듯, 자기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남들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인생'을 성취 하는 데만 인생의 에너지를 소비하다보니,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삶이 공허하다. 또한, 그것 외에는 다른 삶의 공식을 모르다보니 삶이 공허해질수록 의미 없는 성취에 더 목맬 수밖에 없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봐도 딱히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모두, 너무 열심히 살기에만 바쁘다. 결국 사람들은 모든 자기문제의 귀인을 '자기 게으름'으로만 돌리며 '더 열심히 살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물어볼 데가 없는데 보이는 것이 그런 것들뿐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전형적인 악순환의 구조다. 갈급한 마음에 자기개발서들을 펼쳐보지만, '힐링'을 내세운 자기개발서들은 그저 판에 박힌 소리만 반복할 뿐이다.
"너는 태생적으로 소중한 사람이다."
"충분히 잘 살고 있다."
"모든 것은 오해다."
"지금을 견디고 성공만하면 괜찮아진다."
"힘들면 여행을 떠나라, 미지의 곳에 가면 답이 짠하고 나타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셀프힐링'이다. 이 시대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이 힐링마저도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주의로부터 기인한 문제를 개인주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니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요컨대, 인간은 르네상스를 통해 '자아'를 발견했으나 산업 분업화를 통해 '산업의 부품'이 되며 인격을 박탈당했고, 시장경제가 고도화 되고 화폐가치에 의한 인간가치의 고평가(경제력 확보)가 인생의 주요한 '가치체계이자 지배원리'로 확립되면서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그리고 공동체의 해체는 다양하고 고질적인 악성의 문제들을 양산하며 인간 스스로에게 존재의 이유를 물어오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우리 인간들은 뭐가 문제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 닥쳐있다.
부동산 버블을 둘러싼 이해집단간의 정치적 긴장, 개인의 재산권과 사회적 안전망 간의 갈등이 낳는 각종 정치적 이슈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여러 목소리들과 엇갈리는 정책의 방향들, 공적연금을 두고 벌어지는 이해집단간의 싸움. 우리는 이 문제들의 원인을 어디까지 파헤쳐 인정할 것이고, 어느 수준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길어 올릴 것인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도 적절하다고 인정할만한 보상을 받는 길이 묘연할 뿐만 아니라, 도대체 내가 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막연하게 인생길을 걷는 나에게 그 길 중간 중간 스스로 자책하며 되물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바야흐로 개인과 집단간 첨예한 이권 대립 속에서 너도 나도 극도의 외로움을 호소하면서도 어찌해야할지 도통 모르는 이 시대에, 우리가 이 총체적인 난국을 궁극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궁극적으로는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인) 단기적인 경제부양을 통한 밥숟가락 회복이 아니라 '인간성(인간 가치)의 회복'이다. 그리고 그렇게 돈과 상품에 빼앗긴 인간성, 인간의 가치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 인간성을 상실해왔던 그 길을 되짚어 거슬러 올라가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 민족, 우리나라, 우리 마을, 내 친구, 내 가족. 바로 나와 우리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