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병은 대증요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
직업안정연구원 요청 계간지 원고
박재훈(www.gyool.net)
처음에는 다른 나라에서 유래한 민간요법에만 붙여쓰던 외래풍의 낯선 수식이었다. 그 외에는 기껏해야 온라인 RPG(롤플레잉) 게임에서 쓰이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이 단어가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인 책들의 모든 책날개(카피라이트)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다음엔 여행 패키지의 이름이었고, 온갖 자기계발 프로그램들과 상담 프로그램들의 이름이었다. 그 뒤로는 계속 날개 돋친 듯 했다. 정치인들은 이 단어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서로 먼저 선점하고자 난리법석이었다. 그렇게 2010년대에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시나브로 끓어올라 도저히 식을 줄 모르는 거대한 트렌드, 바로 '힐링(Healing)'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이 익숙하지도 않았던 단어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힐링'은 과학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치료법은 아니지만 신통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테라피 요법에나 붙이던 수식이었고, RPG 게임에서 데미지를 입은 캐릭터를 회복시키거나 죽은 캐릭터를 되살릴 때 쓰는 스킬의 명칭이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상처입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단어라는 점이다. 바꿔말하면 작금의 대한민국은 너도나도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 고백하며, 너도나도 "내가 그 치료법을 안다."고 주장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그렇게 흐른 시간이 벌써 수년째임에도 불구하고, 치료법을 안다는 사람들만 넘쳐날 뿐 완치가 되었다는 사람은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인불명의 이 역병의 기세는 온 대한민국을 집어삼킬 기세다. 도대체 우리가 앓고 있는 이 전국적인 역병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하고 있기에 몇 년이 지나도록 불길을 잡지 못하는 것인가?
'힐링'을 내세우는 책이며, 여행 패키지며, 자기계발 프로그램들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본론을 언급하기에 앞서 우리사회의 약점들을 꼬집는다는 점이다. '역사상 최고의 고학력 세대이면서도 취업률은 가장 낮은 세대여! 3포 5포 N포 세대여! 달관세대여! 여기에 당신을 위한 힐링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이들이 주장하는 힐링요법(해결책)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또 한 가지 공통점이 드러난다. 바로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1인 서비스'라는 점이다. '외로운 당신을 위한 자가힐링법',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나홀로 힐링 여행', '자아를 발견하는 단기 속성 취미·레저 프로그램'.
그렇다. 되짚어 돌아보면 우리가 상처를 호소하며 힐링을 갈망하게 된 것은 대부분 외로움'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의 고통에서 기원하는 것이었다. 혼자 꾸려가는 삶은 '자유의 완성'을 대표하는 화려한 로망인양 여겨졌으나, 실상은 역변하는 삶의 환경에 온전히 대처하는 것 조차 녹록치 않은 현실 뿐이었고, 그 현실을 처절하게 견디어낸 사람들에게 남는 것도 시시콜콜한 일상과 감정마저 진솔하게 나눌 사람 하나 없는 적막과 외로움 뿐이었다. SNS를 통해 구축되는 온라인 인간관계는 날이 갈수록 조밀해졌으나, 정서적인 펀더멘털(모집단)로 삼기엔 한참 역부족이었다. 우리에게서 가족의 중요성이 약화되고(우리가 가족으로부터 요구받는 의무가 점차 소멸되고) 친척과 이웃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동안, 우리사회에 서로의 첨예한 주장은 점차 늘어갔으나, 책임과 연대는 사라져갔다. 하늘은 날로 높아지고 넓어졌으나, 동시에 우리의 발 아래 바닥도 아득히 깜깜해진 셈이다. 다양하고 당당해진 자유와 함께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로 귀속되었고, 언젠가부터 우리는 '도저히 한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렇다. 대학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고, 스펙 쌓기는 잔인하며, 취직은 낙타 바늘구멍 지나가는 일 같고, 결혼은 여유있는 사람들의 전유물 같다하지만, 우리가 힐링을 갈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담벼락이 되어주고 천장이 되어주며 바닥이 되어줄 안전망으로서의 공동체가 해체된 까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처방전들은 환자들을 제대로 겨냥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외로운 환자들에게 내놓은 처방이 '나홀로 힐링'이라니 어딘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는가. 온 사회가 '스펙'이란 말로 홍역을 앓던 2000년대, 모든 것이 불확실한 한밤중의 망망대해를 앞둔 청년들을 두고 한편의 사람들은 "놀면 뭣하나, 뭐라도 이력서의 한 줄을 더해라." 조언했고, 이 열광적인 카니발리즘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한편의 사람들은 "인생을 관통하는 목적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화려하기만 한 스펙은 무의미하다." 외쳤다. 그리고 그렇게 목적없이 큰 바다를 불안감으로 떠돌며 하루하루를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온 젊은 세대는 이제와 모두 힐링을 요구하는 환자가 되었고,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1인 서비스'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숱한 처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치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이 모든 치료가 원인을 발본색원하는 진정한 의술이 아닌, 증상의 제거 ㅡ 즉, 대증요법(질병의 원인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표면에 나타난 증상만을 가지고 이에 대응하여 치료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장의 사진이 실린 인터넷 기사가 네티즌의 대화를 달궜다. 한 대기업에서 일주일에 한 번 시행하기로 한 '칼퇴데이'가 도마에 오른 것이다. 해당 기업은 임직원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준비한 이벤트라고 설명했지만, 네티즌들은 '6시에 정상 퇴근하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이면, 저렇게 당연한 일로 공식적인 이벤트를 벌이는가!'라며 탄식했다. 증상은 잘 진단했으나, 처방을 엉뚱하게 내린 결과가 낳은 참사였다.
우리 사회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상처의 고백과 이에 대한 힐링 처방도 마찬가지다. 온전한 치료는 정확한 진단으로부터. 역병은 대증요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 문제가 명확한 만큼 진정한 처방은 너무나도 간결하다. 애초에 인간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요 근래 법과 사적 자유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요구하는 책임의 크기는 한 인간이 지기에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크기의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불완전함의 해결은 연대다. 불확실성의 해결은 서로를 책임지는 신뢰의 회복이다. 외로움의 해결은 공동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