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후 사람들이 사회적 변화를 꾀할때마다 내세운 기치의 주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 "자유" "자유"였다.
이렇듯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에 묻혀 왜곡된 인간의 역사는
자동차가 날아 다닐 것만같던 21세기에 들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아보인다.
미국을 선두로 한 학자들은 '신자유주의'라는 그럴싸한 말로
'자유'에 대한 해묵은 논리(제국주의적 개항요구)를 껍데기만 바꿔 들고 나왔고,
소득세 한푼 내지 않는 월 400만원 이하 국민들도 소득세 증세를 반대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처럼,
신자유주의에 옳다쿠나 꼬릿말다는 제3세계 학자들까지 엉겨붙어
마치 작금의 이 세계는 '자유'를 신봉하지 않으면 세계적인 이단아로 취급받을 것만같은 실정이다.
과연 '자유'는 인간이 꼭 바라봐야할 지향점인가?
역사적으로 '자유'는 은연중에 '평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 말은 '자유'가 확대되면 '평등'은 당연히 감소되는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우리는 흔히 말하는 '자유'의 의미가 '방종'에 가까이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freedom도 liberty도 정의를 살펴보면 '자유'라는 개념에 앞서
'구속, 압제'라는 것에서 해방됨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특정 구속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기반으로 해방을 요구하고,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어떠어떠한 구속이 없는 것,
혹은 구속에서 해방 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옳다.
하지만 현대에 말하는 자유는 애초에 아무런 구속도, 설득도 없이 백지를 던져놓고
'이것이 자유다'. '자유가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인간은 기독교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탄생의 순간부터 사회적이었다.
아담조차 혼자있을 수 없기에 이브와 함께 있었다. 그것은 환경적인 요인일 수도 있고, 신의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사회적이다. 이런 '사회적'이란 말은 일면 '개인'이 어떻게든 침해받음을 뜻하기도 한다.
식량이 있어도 사회를 위해 '적당히' 나눠 먹어야 한다. 아파도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있다면
치료제를 양보하거나 같이 나눠써야 한다. 내가 가고싶은 길이 있어도 사회를 위해서 의견의 일치를 봐야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홀로 내 갈길을 가는것보다 이득이다.
이것은 '구속'과 '압제'이기 이전에 '사회적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의 영리함이 원초적으로 드러난 역사적 유산이다.
인간은 혼자일 때 보다 스스로의 몫을 조금씩 떼어 각자의 손해를 감수하며
많은 사람이 한무리를 이룰 때 단순 합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어찌보면 역사적 탄생의 과정은 복잡하지만,
그러한 원리가 극대화된 것이 현대의 국가이고 대륙연합이라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평등"이란, 자신의 손해를 인내하고 공동체에 참여한 각 참여자에게
'모여서 생긴 힘'을 공평하게 나눠주기 위한 개념이다.
그런데 그러한 평등을 무시하고 자유를 향한 목소리만 드높인다는 것은
태초부터 존재해온 '사회계약'을 파기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스스로의 파멸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시민혁명을 일으키며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르네상스를 통해 '신'으로부터 탈출했으며,
산업혁명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유럽.
이렇듯 스스로를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라고 자화자찬하는 유럽은
19세기,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수많은 희생을 소비했다.
그들은 그들의 논리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 백인이 아닌 인류를 유인원으로 취급했다.
그런 그들이 20세기 말을 거치며 선택한것은 '평등'으로의 전향, 복지국가였다.
유럽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자유'가 실현된 때는,
외부의 식민지로부터 꾸준한 잉여 공급이 있을때 였거나,
'민족', '국가'개념이 태동할 당시 땅과 식량이 모두에게 돌아가고도 넉넉히 남을 때, 그때 뿐이었다.
유럽의 경험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한가지는
'사회계약'으로 탄생된 '권력'의 오/남용에서 오는 압제와 구속이 있다라면,
인간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를 요구해야 사회적 효율 극대화에 가까이 갈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자유' 요구는 스스로를 파멸로 끌고간다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내가 밝혔듯이 지나친 자유는 결과적으로 극과 극을 낳는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자유는 필연적으로 절대부와 절대가난을 양산한다.
그리고 절대부와 절대가난은 사회적 비효용을 낳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사회의 구성근거가
(개인으로 존재할때보다 사회로 뭉칠때 단순합 이상의 결과를 내는, 즉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즉, '자유'라는 것은 경제학이 그토록 좋아하는 '효용 극대화'라는 측면에서도 옳은 선택이 아니다.
고전경제학은 개개 인간의 이기주의가 사회적인 풍요를 보장할 것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개 인간의 이기주의가 (필연적으로 완전히 근절 될 수는 없는) 현실적인 정보 비대칭성과 힘의 논리,
법의 불합리성등과 결합할 때 절대부와 절대가난을 양산하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최대 효용달성에 실패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계급간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자본주의는 과연 사회적인 효용극대화를 위한 완벽한 매커니즘인가?
그것은 세련되어보일진 몰라도 실상은 대충 성글게 엮은 거대한 욕망결정체에 지나지 않는다.
개개인의 손해로 뭉쳐진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의 더 나은 효율적 운영을 위해 탄생한 권력.
하지만 권력을 통해 사익을 얻고자 노리는 인간들. 자본주의는 계급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계급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자본주의가 '그럴싸'한 만큼 실상은 더욱 비참하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자유를 주장한 사회변화는 이면에 '자유를 통한 이권'이 존재할 때만 일어났다.
미국이 지금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섬뜩하지 않나.
2008. 9. 18.
GyoolG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