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을 ‘평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
나는 KBS 라디오의 한 장애인 프로그램에서 연극·뮤지컬·전시 등 문화예술 콘텐츠를 소개하고 평론하는 패널로 약 2년간 출연했었고, 그 경험을 발판 삼아 장애인고용공단과 중소기업진흥공단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문화예술 콘텐츠를 평론하는 전문인 필진으로도 수년간 활동했었다. 대학에서 문화예술에 관련된 전공을 한 것도 아니었고 관련분야에 종사한 것도 아니었지만, 평소 뮤지컬과 연극을 좋아해서 관람을 자주 다니며 개인 블로그에 감상후기를 꾸준히 올리던 것이 당시 라디오 담당 연출의 눈에 들어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라디오 리뷰를 하던 2014년 한 해 관람 공연물과 전시가 100편 가량이고 생후 지금까지 관람한 모든 편수를 더하면 200편이 넘으니, 보통사람 치고는 ‘좀 보러 다녀 본 사람’인 셈이다.
‘예술 작품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분석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입증되어 왔지만, 내가 한 명의 관람객으로서 느끼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 중 기본적인 것은 ‘객관화를 통한 보편(평범함)의 규정’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예술은 그 작품의 구성과 표현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한 사회의 표준’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이 ‘지향점’을 표현하였다면 동시에 그 사회가 현재 달성하지 못한 어떠한 것(혹은 상황)을 부각시킴으로서 간접적으로 현 사회의 보편을 규정하는 결과를 낳고, 작품이 어떠한 부문의 ‘사회적 바닥’을 표현하였다면 동시에 그 사회가 내포하는 보편(평범함)이 어떠한 수준을 이루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규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직접적으로 현재를 재현하는 표현이 담긴 작품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대부분의 예술 작품이 화자(작가·출연자 등)와 관람자를 철저히 구분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객관적으로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예술의 이러한 기능은 더욱 강력하고 지속적인 효과를 낸다고 볼 수 있다. 관람자가 그 부분에 대해 특별히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작품을 관람한 것이 아니라면, 한 개인이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으로만 갖고 있던 우리 사회의 보편(평범함)에 대한 어떠한 기준이 작품의 공연(또는 전시)과 관람의 과정을 통해 일부 수정·보완을 거치며 ‘객관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결과 정리된 생각이 마치 ‘사회적으로 검증된 보편타당한 기준’으로 여겨지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 당사자인 나는 ‘예술작품 속 장애인’에 대한 표현이 얼마나 용인할만한 수준인지에 대해 항상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수준이었다. 거의 모든 예술작품이 ‘인간과 인간의 삶’을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장애인이 등장조차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장애인이 등장하는 몇몇 반가운 작품들 속에서도 장애인은 ‘소외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수동적인 사람’, ‘주변인’으로 표현되기 일쑤이다. 그러한 ‘보편의 폭력적인 규정’ 속에서, 장애인은 ‘마음 따뜻한 주인공(비장애인)의 선행’ 또는 ‘악역(비장애인)의 악행’을 부각시키는 보조물로 활용되거나 주인공 또는 사회의 심리적·물리적 불완전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조소彫塑의 기능에 국한되었다. 즉, 많은 작품들 속에서 장애인은 ‘주체’와 ‘등장인물’이 아닌, ‘도구’요 ‘대상對象’으로만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부 장애인 당사자가 창작한 작품들에서도 비장애인의 프레임이 그대로 수용되어 장애인 자기 스스로를 ‘불완전체’로 설명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대학시절, 인권에 대한 교양수업을 듣던 중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썼던 전략적 실무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는 한동안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신기하고 참신한 정책인즉슨 CF(Commercial Film) 또는 드라마와 같은 대중 영상 매체에 유색인종을 평범한 사람 또는 상위계층으로 표현하는 빈도를 늘리고 하위계층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역할에는 가급적 백인을 배치하도록 유인해서, 시청자들의 인식 속 ‘우리’의 범위를 넓히고 ‘우리 구성원 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갈 길이 먼 우리의 미디어와 문화예술이 갖고 있는 한계는 자명하다. 인간 내부의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조만간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람들을 동요시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장애인은 주변인이요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려질 뿐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고질적인 오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장애인이 겪는 장애의 원인을 장애인 당사자에게 모두 귀인歸因함으로써 장애인을 정상正常의 범주에서 쫓아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질적인 차별의 원인을 지적하며 ‘사회의 보편적 문화 속 화자는 항상 남자였다’고 일갈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장애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의 보편적 문화 속 화자는 항상 비장애인’인 것이다. 그들의 평범하고도 자연스러운 판단과 규정이 ㅡ그들의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는ㅡ 자기 스스로도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강권적 폭력’이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인 내가 서른 남짓한 인생을 살며 ‘장애’에 대해 또렷하게 배운 한 가지는, 장애인이 겪는 ‘장애의 원인’이 장애인 당사자에게 모두 덮어씌울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2004년ㅡ 기숙사에 이삿짐을 풀고 처음 찾아간 매점 입구에는 높은 계단이 있었기에 당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던 나는 얼마든지 물건과 맞바꿀 수 있는 돈을 갖고도 하릴없이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필품 하나 살 수 없는 ‘장애인’이었으나,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2010년ㅡ (나와 수많은 장애인 학생 동료들이 함께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학교 측에 갖은 요구를 한 끝에) 완만한 경사로가 놓인 기숙사 매점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두 다리로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장애를 겪는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과자 한 봉지 사는 하찮은 일과 남에게 부탁하는 일 사이에서 ‘효용과 미안함’의 경중을 따지며 ‘더 착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보행 장애인들의 모습도 사라졌다.
나는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공간 속에서 나는 변한 것이 없으되 나의 장애는 사라졌으니, 과연 2004년에 내가 겪었던 ‘장애’는 ‘나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한 것이었던가― 혹은 그 간단한 경사로 하나 미처 마련하지 못한 ‘학교의 정책적 과실’에서 기인한 것이었던가. 그리고 나는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예술작품과 미디어의 ‘당연한 듯한 프레임’을 대하며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장애가 내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내 장애의 제거가 사회의 정책적·문화적·물리적 개선에 더 달려있는 일이라면, 어째서 나는 그 ‘우리’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인가!”
백번 양보하여 콘텐츠는 그렇다 치더라도 관람환경은 양호한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한 명의 장애인 당사자이자 문화예술을 즐겨 소비하는 한 명의 애호가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느끼는 점은 많은 양질의 예술문화 콘텐츠가 장애인들에게 매우 저렴한 가격(보통 50% 할인, 중증 장애인은 동반 1인까지 할인적용, 일부 고가 대형극은 30% 할인) 혹은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매우 부정적인 점은 그 파격적인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애인들이 ‘관람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환경’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극장에는 계단 투성이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유명 전시에 휠체어를 위한 동선·시야 확보는 고려조차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고,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구는 어딜가나 턱없이 부실(또는 전무)하다.
한 사회의 수준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그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모습에 있다고 했던가. 한류를 차세대 효자효녀 상품으로 육성한다는 ‘문화강국 대한민국’, 만연한 경제위기를 논하며 대처하는 것이 일상이 된 오늘 날에도 매일같이 예술문화 산업의 규모가 커가고 있는 ‘고급진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나는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장애인을 ‘평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무엇)인가!”
장애인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2016년 9월 원고, 박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