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 다양성, 그리고 장애 ]
박재훈
요즘은 어딜가나 '소통'이 이슈다. 내가 손수 공동창업하고 2년간 몸담았었던, 구성원이라봐야 공동 창업주 세명이 전부였던 벤처기업에서도 회의 때마다 다뤄지는 단골논제였고, 내가 4년째 일하고 있는 이 공기업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소통, 소통'이다. 죽기살기로 생산성에 매달려야 하는 사기업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ROI(Return On Investment 투자수익율)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법에 의해 과점시장을 보호받으며 안정적인 운영을 하는 것이 사명인 공기업들 조차 어째서 이토록 소통에 목을 매는 것일까.
그만큼 소통이 생산성 제고여부를 떠나 조직을 견고히하는 기본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조직의 흥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전체가 분업기반의 산업고도화를 이루면서 누구나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된 요즘에는 더욱 그러하다. 모두가 각자의 업무에 대해서는 전문가일지언정, 그 여러가지 성과들이 하나의 방향에 맞춰 톱니를 정확히 물려야 '성과'가 발생하는 시스템에서의 '소통'은 '조직을 운영하는 가장 기초적인 설비'인 셈이다.
벤처기업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장점은 '소통하기 편하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 3명이 의기투합하여 창업한 회사였고, 나중에 직원으로 채용한 사람들도 나이차이가 크지 않은 사람들이었던데다, 공식적인의 수직구조 없이 말단 직원부터 사장까지 모두 친구처럼 지내는 허심탄회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조직에 '소통문제'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의사결정구조가 없었던 그 벤처기업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책임문제'가 불거져나왔다.
"이 결정은 누가 한거야? 내가 생각했던거랑 너무 다른데?" "너하고 같이 회의할 때 이야기 했던 거였잖아. 난 네가 동의한 줄 알았는데." "대충 동의한건 맞아. 하지만 난 그 이야기의 구체적인 내용이 이런건 줄은 몰랐지." "그랬다면 더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다고 말했어야지." 조직의 운영에 있어 문제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르고 정확한 문제 해결책 모색'인데,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는 문제해결보다 '누구의 책임인가'를 가르는 것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서적인 에너지를 소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소통문제는 직접적으로 업무해결에 걸리는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한 잘못 밖에는 없는 업무담당자의 사기저하로 이어져 총체적인 생산성 저하를 낳는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만으로 모든 소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체계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오랜기간 고착화 되어있을 경우, 소통의 병목현상과 같은 경직을 초래해 더욱 다양하고 고질적인 소통문제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이렇게 커질때까지 왜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대고 있었어? 나한테 말했으면 문제가 커지기 전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잖아?"라는 상사의 호통에 "평소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 줬어야지. 그리고 어차피 말했어봐야 '이것도 혼자 해결 못하냐'는 말 밖에 더 들었겠어?"라는 혼잣말을 속으로 되뇌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한국형 조직문화의 부인할 수 없는 민낯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조직 내 소통에 대한 요구는 현장에서 이미 수십년에 걸쳐 반복되어온 해묵은 논제다. 기업의 규모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왜 이처럼 간단해보이는 문제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앞서 다룬 벤처기업과 큰 기업이 겪는 소통문제의 두 사례를 다시 들여다보자. 언듯보면 굉장히 상이해보이지만 곰곰히 살펴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역지사지'가 안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인가 할 수 없는 분위기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했을 때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오랜기간 남성중심 사회를 견고하게 유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성이 군필자이다보니, 상명하복의 군대문화가 자연스럽게 기업에도 흘러들었다. 허심탄회한 소통과 상대의 의도를 살피는 이해보다는 판단과 명령이 우선이고, 적극적인 설명과 인내가 녹아 있는 설득보다는 절대복종과 빠른 일처리가 미덕이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리더'(결정권자)와 '팔로워'(직원)이 명확히 구분되며, 팔로워들은 그저 리더의 '도구'에 그친다. 많은 한국의 기업들이 일처리는 일사분란하나, '똑똑한 사람을 데려다 바보 만드는 집단이다'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까닭이다. 좋은 인재들을 데려다 놓고도 도구로밖에 사용하지 않으니, 원천적인 혁신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 기업들의 장애인 고용 기피 현상도 소통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피고용인을 '도구적 관점'에서만 다루기 때문에 '손에 감기는 준비된 도구'를 찾는 것에만 익숙하다. 하지만 정말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기 원한다면, 정말 이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한다면, 피고용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파악하고 교육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 사람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데 문제가 되는 장벽을 없애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만약 이런 환경이 구축될 수 있다면,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은 많은 경우 그리 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장애인이 듣지 못한다고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쓰지 못한다고 발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장애로 인한 독특하고 어려웠던 인생의 경험들이 장애 당사자들의 비계량적인 능력을 높여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장애인 노동자를 잘 갈고 닦았을 때 비장애인들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발휘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환경과 체계를 조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이 바로 '소통'이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상대방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먼저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한 사람의 지식축적이 기술발달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혁신적으로 빠르게 발달한 통신과 교통과 물류와 인적교류가 세계를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내고 있고, 셀 수 없는 다양한 요인들이 내 판단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누군가 한 사람의 견고한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 내린 판단보다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경험의 종합이 필요한 '집단지성·집단이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특히 이런 환경에서는 다양성에 기여하는 '독특한 사고방식'과 '남다른 경험'이 주효한 기능을 할 수 있는데, 장애인의 흔치않은 삶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아직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소통에 서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치는 '혁신'도 결국 병목현상을 거친 의사결정의 결과로 도출된 '페이퍼워크'에 그치고 있고, '소통'은 '김병장이 막내 박이병에게 강요하는 야자타임'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도태될 것인가, 살아 남을 것인가. 살아남기 원한다면, 소통하자! 실적을 쌓고자 서류로 일을 벌이는 가짜 소통이 아니라, 내 주장을 상대에게 관철시키기 위한 구색으로서의 소통이 아니라, 상대의 상황과 의도를 살피는 소통을 하자. '갑갑해서 못살겠다'하는 꼼스러운 외침이 아니다. 소통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미래의 먹거리를 발견케 할 것이며, 그토록 많은 돈을 들여야만 가능했던 생산성 제고를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직업안정연구원 계간지 프리즘 원고